인천산재병원에는 ‘비밀의 화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재활공학연구소 뒤편에 있는 특수재활요법 원예교실 실습장. 이곳에선 소사나무, 러브체리 등 수백여종의 화초가 저마다의 아름다운 향을 피어내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꽃이고 나무임에도, 이곳 화초들의 향과 모습은 여느 화초들보다 향기롭고 아름답다. 그 이유는 아마 이곳 화초들 모두가 남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의 화초들은 산업재해를 입은 산재근로자들이 아픔을 잊기 위해 정성으로 키워낸 것들이다. 산재를 입고 어둠과 실의 속을 헤맬 때, 이들 꽃과 나무는 유일한 삶의 희망과 즐거움이었다.
특히 원예교실의 반장으로써 이곳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는 김진권씨에게는 이곳 실습장과 꽃들이 그의 남은 인생 전부가 되었다. 이제는 자신이 꽃에게 받은 위안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흔히 볼 수 있는 꽃이고 나무임에도, 이곳 화초들의 향과 모습은 여느 화초들보다 향기롭고 아름답다. 그 이유는 아마 이곳 화초들 모두가 남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의 화초들은 산업재해를 입은 산재근로자들이 아픔을 잊기 위해 정성으로 키워낸 것들이다. 산재를 입고 어둠과 실의 속을 헤맬 때, 이들 꽃과 나무는 유일한 삶의 희망과 즐거움이었다.
특히 원예교실의 반장으로써 이곳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는 김진권씨에게는 이곳 실습장과 꽃들이 그의 남은 인생 전부가 되었다. 이제는 자신이 꽃에게 받은 위안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작업 중 지게차에 치여

김진권씨가 사고를 당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M목공관련회사에서 생산관리과장으로 재직중이었다. 이곳은 거실 인테리어용 마루판 등을 만드는 회사로, 규모는 크진 않았지만 우수한 품질로 인해 업계에선 인기가 꽤 높았다.
때문에 공장은 밀려드는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늘 바쁘게 돌아갔다. 사고가 난 그날도 김진권씨는 제품을 꼭 기일내 납품해달라는 영업사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몇 명의 사원들과 함께 야근을 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김진권씨는 작업이 예정만큼 진행속도를 내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를 찾고자 잠시 고개를 돌려보니 일손이 모질라 타 부서에서 차출해 온 신입사원 하나가 잘못된 방법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전 공정을 중단시키고 신입사원에게 다가가 올바른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그때였다. 멈춰있던 지게차가 큰 엔진음을 내며 김진권씨를 향해 달려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게차는 그를 매단 채 공장벽에 부딪힌 후에야 멈춰 섰다.
12번의 수술 끝에 다시 걷게 돼
지게차의 엔진음이 꺼지고 공장에는 정적이 돌았다. 김진권씨는 그제서야 사태가 파악이 됐다. 평소 지게차를 신기해하던 한 베트남 근로자가 운전기사가 자리를 비운사이 호기심을 못 참고 운전대를 잡은 것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진 후였다. 그는 아픔을 참으며 지시를 내렸다. 잠시 뒤 119구조대가 도착했고, 그는 병원으로 급히 이송됐다.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척추가 일부 골절됐고, 왼쪽다리와 오른쪽 다리가 각각 3조각, 2조각 났다. 담당의사는 그에게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직 대학교육도 마치지 못한 자식들 생각이 났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보다 큰 병원이라면 다리를 고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즉시 병원을 옮기고 그곳 의사에게 다리를 절단할 수는 없다고 어떻게든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렇게 긴 치료가 시작됐다. 수년 동안 총 12번의 수술이 이어졌다. 완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술과 치료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걷고 말겠다는 의지로 재활치료에 매진한 그의 노력도 큰 효과를 불러왔다. 많이 절뚝거리지만 그래도 그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작은 화원 여는 게 남은 목표
본격적인 재활치료를 위해 2005년 인천산재병원으로 옮겼다. 재활치료도 치료지만 이곳에서 가르쳐준다는 금속공예, 목공예 등 특수재활요법을 배우고 싶었다. 특히 그가 배우고 싶었던 것은 금속공예였다. 이 기술을 익혀 어떻게든 향후 활로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산재 후유증은 이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통증으로 인해 손이 떨려 도저히 배움을 이어갈 수가 없었던 것.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실의에 빠지게 됐다. 그때였다. 특수재활요법분야 중 하나인 원예교실의 이지훈 교사가 원예를 배워보라며 그에게 다가왔다. 이 교사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원예실습장에서 그는 큰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꽃과 나무가 주는 자연의 싱그러움에 한 순간 젖어들고 만 것. 그길로 원예에 입문했다. 그리고 원예기능사 등의 관련 자격증도 취득, 전문성도 갖췄다. 이후 그는 인천 화훼장식지방대회 은상 2회(2006·2008년), 경기도 지방대회 은상(2009년)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뽐내는 원예전문가로 거듭났다.
꽃들이 커감에 따라 그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줄어들었다. 또 화초들이 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큰 기쁨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이처럼 자신이 받은 기쁨과 위안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작은 화원 창업을 모색하고 있는 것.
언제가 문을 열 그의 화원이 미래를 두려워하는 많은 산재근로자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길 간절히 기원해본다.
저작권자 © 안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