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대 분수령! ‘안전불감증’이 빚은 궁정동의 총소리
그 최후의 만찬장, 그 때 그 사람들… 여기서 잠시 1979년 10월 26일에 있었던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을 삽입하여 그 전, 18년간의 박정희 시대를 되돌려 역 추적해 볼 생각이다.
그 이유는 이른바 궁정동 ‘최후의 만찬장’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오로지 조국의 경제부흥과 산업발전을 걱정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그에 따른 역사적 진실을 추적해 보고 싶어서이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최고 분수령이라 할까.
경제강국을 향한 산업혁명 질주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던 그 날의 그 참상은 어쩌면 대한민국에 천둥과 번개가 내려치던 순간과 다름이 없었다. 이른바 10.26사태! 그날 낮까지 삽교천 제방준공식에 참석했던 대통령이 그리도 믿고 키워준 심복부하요 고향후배인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총을 맞고 쓰러진… 지금부터 34년 전의 사건! (이상무 화백이 그려낸 사건현장 아래 그림참조)
대한민국 산업발전, 아니 산업혁명이라 할 만한 시대의 ‘영웅’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안보는 ‘유비무환’이란 네 글자를 가슴에 새겨가며 철저히 지켜내었으나 당신의 개인신변안전 문제는 소홀했던 것 같다. 그 순간 옆에 앉아있던 두 여인도 어느새 60을 내다보는 중년부인이 되었다.
사건당일 상황부터 살펴보자. 그러니까 지금 우리산업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40~50대 중견 역군들이 초등학교 내지 중고등학생 때 있었던 그 시절.
‘거지나라’를 ‘부자국가’로 만들기 위해 돈 있는 나라를 찾아 나선 박정희대통령 내외분께서는 70년대 도약을 준비 하면서 동분서주 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볼 대목은 당시 10대 후반의 처녀인 대통령의 장녀, 박근혜(서강大 재학)가 맨 뒤에서 아버지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동행하며 외교 순방정치를 구경하는 장면이다. 그녀가 40여년 후 이 나라 제 18대 대통령이 되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우리나라 산업경제 부흥을 위해 세계를 향해 아버지 대통령께서 날개를 펼친 그때부터 아마도 지금의 박근혜대통령은 굳건하게 외교정치를 잘 하려면 누구든지 외국어에 능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후 열심히 공부하여 세계 5개국 언어를 통역관이 없어도 구사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아 온 듯싶다. 그래서 최근 세계 최고 강국의 지도자들인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나 중국의 시진평 주석도 친근한 영어와 중국어 연설에 대단히 좋은 호평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어쨌거나 대한민국산업발전의 ‘영웅’이란 소리를 들었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안전은 철통같이 지켰으나 당신의 개인 안전은 지켜내지 못한 채 비운의 날을 맞이한다.
그 사건은 우리 산업발전의 단절의 한 분수령이기도 하였지만 일부 인사들 측에서는 일찍이 ‘유신의 종말’로 평론을 했다. 아무튼 박정희정권의 유신(維新)은 시작부터 불길한 예감 같은 그런 게 감지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부 과잉충성파 권력자들의 함구령 내지 보도통제 때문에 세상에 잘 알려지지않은 놀라운 사건스토리(불길한 운명을 암시) 한 토막을 ‘이제는 말 할 수있다’라는 개념으로 여기에 밝혀 두겠다.
1972년 12월23일, 오전10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통일주체 국민회의(유신선포) 개회 첫 행사가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유신헌법에 따라 구성된 국민회의는 첫 모임을 갖고 대한민국 제 8대 대통령선거(간접선거)에 들어 간 것이다.
그때 체육관 천장엔 5색 휘장이 드리워졌다. 대의원 2천 3백 59명과 전체 국무위원을 포함한 내빈 4백여 명은 실내를 장중하게 메우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단상 맞은편 1층 바닥엔 거대한 태극기가 깃대에 꽂혀 7m쯤이나 높게 솟아올랐다. 국기에 대한 경례가 끝나고 곧 국민회의 의장인 朴대통령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개회사를 읽어 내려갔다.
“10월 유신은 이 민족의 지상명령에 따라 민족의 안정과 번영, 그리고 통일조국을 위해….”
순간 이게 웬일인가. 개회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태극기 깃대가 서서히 휘어져 내려왔다. 개회사가 끝날 무렵엔 ‘꽝’하는 소리와 함께 태극기가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대통령을 뽑는 중요한 자리에서 매우 상서롭지 못한 일이 터진 것이다. 첫 걸음마에 나선 유신이 낙상(落傷)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유신 비판론자들은 이를 두고 “유신정권은 출발부터 그렇게 불길했다”고 꼬집는다.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깃대는 왜 부러졌을까. 김창식 전교통부장관은 당시 총무처 총무국장으로 행사를 준비했었다. 그는 식장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으며 ‘내 관운도 이걸로 끝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당초에는 정면 벽에다 붙이려 했는데 잘 보이게 하려면 바닥에 높게 세우는 게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지요. 그래서 하루 전에 부랴부랴 깃대를 만들었어요. 직경이 10센치나 되는 플라스틱 파이프를 서너 개 묶은 거였지요.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그런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감당할 길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사표를 썼죠. 다행히 朴대통령이 그냥 덮어줘 무사히 지나갔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김정렴 비서실장·박종규 경호실장·서일교 총무처장관이 朴대통령한테 서로 자기 잘못이라고 했대요. 그러나 朴대통령은 웃으면서 ‘취임식 준비나 잘하라’고 했다는 거죠.”
얼른 보면 냉엄하기 짝이 없는 무서운 사람같이 보인 박대통령 이었지만 결코 사소한 그런 문제를 가지고 부하를 문책하지 않는 대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신은 그렇게 이런저런 얘깃거리를 낳으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79년 10월 26일 정말 그날 쓰러진 깃대처럼 ‘꽈당’하고 넘어져버렸다. 탄생·성장·쇠락·의 주요과정은 이제 세월 덕분에 양지에 드러난 역사가 되어 있다.
다시 10.26사건! 현장으로 되돌아 가보자. 이는 그날 저녁 최후의 만찬장에서 가수 심수봉 씨가 불렀다는 ‘그때 그 사람’이란 노래 제목처럼 그야말로 ‘그때 그사람들’ 이야기를 정확하고 바르게 써내어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서다. 이른바 ‘궁정동의 총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깨트린 그날부터 지금까지 30수년간… 그 사건 현장에서 피로 물든 채 쓰러진 대통령 일행을 바라본 ‘역사의 증인’에 대하여 모든 메스컴에서는 두 여인의 뒷모습만 실어내었다(사진 참조).

그리고 그 두 여인들의 이름도 ‘손금자와 정혜선’으로 발표했다. 물론 그것은 당사자들 개인적 프라이버시에 관한 문제 때문이었지만, 그로 하여 시중에 난무했던 말하자면 ‘카더라 방송’은 그녀들을 상당히 좋지 않게 매도하였으며 마치 북한의 ‘기쁨조’ 같이 비유를 해가면서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서울시내 술집에서는 ‘술안주’ 거리가 되었으며 식당과 다방가에까지 엄청스레 회자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차제에 역사의 한 기록자 책무감에서 사실과 진실을 바르게 기록하여 대한민국 사초(史草)의 한 단면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거두절미 하고 그날의 현장 여인들은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가수 심수봉씨(오른쪽), 그리고 모델 신재순씨(왼쪽사진)이다. 그녀들은 범인 김재규 재판 때 군사법정증언에서 “대통령 각하께서는 서거 직전까지 당일에 있었던 삽교천 이야기며 나라의 산업부흥에 따른 말씀만 하셨다”고 증언하였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러 그녀들도 어느새 60을 바라보는 중년나이가 되어 그날의 충격 때 입었던 마음의 상처는 많이 아물었겠지만 목숨이 살아 있는 한 그때의 놀라움은 그녀들 양 가슴에 영원히 사무쳐 있으리라…
어쨌건 그때 그 사건은 당시 청와대 경호실의 오만 내지 ‘안전불감증’이 빚은 대참사 사건으로 봐야한다. 그 이유는 아무리 중앙정보부가 권력이 센 기관이라지만 청와대 경호실은 누가 뭐라해도 대통령의 신변안전에 총력을 기우려야 했고 그런 불상사를 사전에 봉쇄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경호실장이란 사람은 비상무장마저 해제한 채 대통령과 나란히 앉아 술을 마셨다. 그런 ‘설마’라는 태만과 ‘누가 감히’라는 오만적방심이 부른 도리 킬 수 없는 대 참사가 되었던 것이므로 그런 것을 후세들은 준엄한 교훈을 삼아야 할 것 이다.
(여기서 지난1호에 써낸 울산공단 기공식스토리로 돌아가겠다)
울산공업지구 기공식 축하 파티는 당시 울산에는 변변한 호텔이 없어 인근의 경주 불국사 호텔에서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미국의 킬렌처장이 “한국은 생필품도 없어서 미국에서 갖다 쓰고 돈이 없어 원조를 받는 주제에 무슨 공업단지냐? 아직 시기상조다”라고 거침없이 반대의사를 밝혔다.
그로 하여 한미 관계자들 간에 격론이 벌어졌고 킬렌 처장과 김용태 고문 사이에 설전이 오갔다. 박의장은 묵묵히 담배만 피우고 가끔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제일먼저 시작된 울산 정유공장 건설 사업은 LA에 있는 플라워사가 맡기로 했다. 김용태는 미국기업하고 안하면 모든 계획이 어긋나기 쉽다고 판단해 미국기업과의 제휴에 비중을 두었고, 그 다음으로는 일본기업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술회 했다.

그러나 소요 외자의 조달난으로 공사 중단상태에 빠졌던 울산 정유공장 건설계획은 1963년 미국의 걸프(GULF)측의 주식투자 허용(전체의 25%) 및 2천만 달러의 장기차관을 통해 재개되었다. 이 사업은 우리 정부의 외자도입정책의 전환을 가져오는 일대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64년 3월 24일, 서울의 대학생들이 왜 일본에 굴욕적인 회담을 하고 협상을 하느냐며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극렬하게 벌였고 당시 고려대 학생이었던 이명박 훗날 제17대 대통령도 그 데모에 가담했다가 구속이 되는 일도 있었으며 그를 대통령으로 탄생시키는 일에는 또 박정희 대통령의 장녀인 현 박근혜대통령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수도 있었으니 이 또한 묘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보여진다.
아무튼 그 해 4월26일에는 국회 본 의회에서 대일 청구권 자금비리를 폭로한 김준연 의원이 구속 되는 등 정치적 사회적으로 시끄러운 일들이 많았으나 그런 와중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하면서 ‘중단 없는 전진’이라는 대 명제를 내걸고 5월 7일, 제일 먼저 외국과 합작투자로 우리경제의 심장역이 된 울산정유공장을 준공시켰다.
60년대 중반, 솔직히 이때까지만해도 산재사고는 비공개였으니 대한산업안전협회는 유명무실한 단체 취급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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