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 作
제1부 누가 이 여인을 이렇게 만들었나? ⑦ 일중의 참담한 이야기를 대충 다 들은 정 형사는 일단 숙희를 한번 만나 보자면서 자신의 차에 숙희 아버지를 태워 집으로 달려왔다.
그것은 피해 당사자의 말을 들어봐야 범인들의 인상착의나 나이 등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만에 하나 산부인과에 데리고 가서 진찰을 받고 범인들의 체액이라도 검출이 되면 놈들의 검거가 매우 용이하기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변고인가.
정 형사와 숙희 아버지가 집에 도착하기 조금 전 숙희는 발가벗은 알몸으로 부엌으로 달려 나가 어제 더렵혀진 아랫도리를 말끔히 씻어내었던 것이다. 한 발짝 늦은 정 형사의 마음은 참으로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범인 검거를 하기 위해 숙희를 불러 앉혀놓고 어제의 상황을 진술 받고자 하였으나 숙희는 이미 넋을 잃은 상태였고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딸의 모습을 바라보던 일중은 그만 화가 치밀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천정만 쳐다보고 있던 딸아이의 뺨을 후려쳤지만 숙희는 그냥 히죽히죽 웃고만 있었다.
한사코 안 가려는 것을 억지로 차에 태워 시내 산부인과로 데려가 진찰을 받아보니 숙희의 하체는 심한 상처를 입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러나 피해자의 진술도 체액의 검출마저도 확보하지 못한 이 사건의 수사는 자연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다. 정 형사는 일중의 내외를 많이 원망하였다.
사건이 나던 날, 그러니까 어제 저녁 늦게라도 곧바로 신고를 하고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서 범인들의 체액 검출을 하여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에 감정만 시켰어도 범인 검거는 시간 문제였을 거라는 게 정 형사의 주장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사실 성폭행 사건의 범인 검거에 실패를 하는 경우의 대부분이 집안 망신 또는 피해 당사자의 장래 문제 염려 등으로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고 쉬쉬하고 감추어 버리기 때문이며 상대적으로 범인들은 이점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그리고 수사 당국에서는 피해자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각별한 주의로 범인 검거 때까지 극비 수사를 한다면서 송산댁을 너무 순진하다며 탄식을 하고는 차를 돌려서 가고 말았으며 그리하여 그만 그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쏟아진 물처럼 말이다.
아직도 그날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숙희는 그 길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으며 당황한 두 부부는 한약을 지어 와서 달이고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다니기도 하고 읍내 이름난 무당을 찾아가 굿을 부탁하기도 하면서 동분서주로 뛰어다녔으나 모두가 허사였고 사후 약방문이 되어버렸다. 그런 어느 날 어른들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숙희는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던져버리고 팬티 바람으로 그만 가출을 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광녀 숙희의 첫 번째 알몸 탈출 사건이며 그야말로 눈 위에 서리가 내린 설상가상이 된 것이다. 두 부부는 다시 깊고 깊은 절망의 늪 속으로 빠져 들었다. 마음씨가 너무 착해 ‘흥부네’라는 별명까지 붙은 이 집안이 왜 하루아침에 이 지경이 되었는가?
매일처럼 술에 젖어 사는 김일중, 시골 초등학교 교감 선생의 딸로 얌전하고 정숙하게 자라나 거친 세파 모르고 살아온 송산댁 박경자는 이제 약간 실성한 여인이 되어가고 있는 듯 했다. 이런 것을 두고 한치 앞을 모른다는 인간의 운명이라고 해야하나….
저작권자 © 안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