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 作
제2부 한 여인의 인생을 참담히 짓밟은 짐승들 ⑬ “그러다가 만일에 그것들이 증거 대라, 이건 명예 훼손이다 뭐다 하고 덤비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서 어떤 사건은 심증은 가지고 있지만 물증이 없어 범인을 못 잡는 경우가 많다고 정 형사가 말하더라고. 그러니까 우린 그냥 잠자코 있다가 오늘 저녁 투푠가 뭔가 그 결과를 지켜보자구. 설마 수십 년 뿌리 내리고 사는 우릴 그리 쉽게 쫓아내겠어?”
“여보 모르는 소리 말아요. 글쎄. 그 인간들이 어느새 마을 사람 여럿이 술대접해서 매수해 두었다는 소문도 나돕디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공연히 방심하다가 덜컥 추방이 찬성으로 결정이 나면 우린 어쩔거유. 저 성치도 않은 애를 데리구 어딜 이사를 간단 말이유?”
어쨌든 이날 저녁 예정대로 투표 준비는 빨강머리 치맛바람과 함께 서서히 준비가 되고 마을 사람들 수십 명이 회관으로 모여 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한 처녀가 자기 엄마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듣고는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존경하는 동네 어르신들 안녕하세요? 저는 저쪽 과수원 집, 그러니까 수원 댁 둘째 딸 진보라라고 합니다. 저는 현재 이 마을에 살지 않고 용인에서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만 오늘 저녁 마을에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해서 몸이 불편하신 엄마 대신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꼭 한 말씀 드릴 게 있어서 이렇게 감히 마이크를 잡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냥 말로만 전해 들었습니다만, 저쪽 송산댁 숙희가 어떤 치한들로부터 능욕을 당하고 지금 그 충격으로 정신 이상자가 되어 가끔 발작 증세로 옷을 벗어 던지고 마을을 배회한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로 억울하게 당하고도 말 한마디 못한 채 죄인처럼 숨 죽이구 살아가는 그 불우이웃을 다른 곳으로 내쫓기 위해 이런 단체 행동을 한다는 것은 불쌍한 그들을 두 번 죽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라 감히 생각합니다.
이 나라 헌법에는 엄연하게 누구에게나 주거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그분들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 드려야 할 최소한의 양심을 지니고 마음으로나마 따뜻한 애정을 갖고 도와드려야 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진정 이 마을을 떠나야 하고 내쫓겨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 행사는 없던 일로 마감을 해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심정으로 이렇게 감히 호소 드립니다.”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 진보라의 진솔하고도 지극히 인간적인 연설을 조용이 듣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세찬 박수로 그녀의 설득력 있는 연설에 화답을 하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빨강머리 창륭 엄마가 소주를 얼마나 퍼 마셨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으로 나섰다.
“아니, 동네 사정도 모르는 새파란 젊은 아이가 어른들 하는 일에 바라지게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왜 아무도 말 한마디 안 해요? 그럼 다 큰 기집애가 지 행실이 좋지 않아 당한 일을 무슨 벼슬이나 한 듯이 발가벗고 동네방네 뛰어 다니는 걸 그냥 두고 본단 말인가요? 절대루 안 됩니다. 당초 결의한 대로 투표에 붙여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이장님 여러 소리 듣지 말구 어서 투표를 합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부인들은 서로 귓속말만 나누고 있자 수원댁 딸 진보라가 다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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