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 作
제2부 한 여인의 인생을 참담히 짓밟은 짐승들 ⑮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숙희 아버지 김일중은 그 사건 이후 정신을 잃고 있는 딸의 처지가 모두 자신의 부덕함에서 생긴 일로 심한 자괴감을 느꼈으며 겉으로는 표현을 잘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견딜 수 없는 고민과 실의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그날 술을 잔뜩 마시고는 딸이 성폭행 당했다는 그 공동묘지 입구 산마루에 있는 노송에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박복한 자신의 탓으로 돌린 마음씨 착한 숙희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으로 딸의 원혼을 달래주고 딸의 억울함을 씻어 주고 딸의 인생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린 성폭행 치한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경종을 주어 자수케 하거나 아니면 다시는 그런 나쁜 짓을 못하게 어떤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친구들과 가끔 술자리에서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그날 그렇게 자살을 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은 막을 내렸지만 그로 인한 아내의 짐은 더없이 무겁게 된 것이다.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한 송산댁은 정말 형용하기 어려운 서러움에 빠졌으며 처절한 통한을 안고 죽은 남편의 시신을 끌어안고 몸부림쳤다. 어찌 이럴 수가….
싸늘한 남편의 시체를 확인한 그녀는 기절하며 쓰러져 온 동네 사람들을 전율케 하였다. 죽은 남편의 윗 주머니 에서 한 장의 유서가 나왔다
여보, 숙희 엄마. 몇 날 며칠을 생각했으나 도저히 내가 얼굴 들고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이렇게 먼저 가오. 모든 게 다 이 못난 애비, 이 무능한 남편 때문에 빚어진 비극인가 싶소. 당신은 너무 슬퍼만 하지 말고 나의 시신을 화장하여 강물에 뿌리지 말고 아버님 산소 옆 잔디밭에 뿌려주오. 내 혼령이나마 저승 가서 아버님께 이 불효를 빌어야 될 것 같소. 먼저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해 주오. 그리고 나의 이 죽음을 방송국에 알려 뉴스 보도가 되어 우리 숙희를 저렇게 만든 인간들이 조금이나마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절대로 그런 나쁜 짓 못하게 하시오. 이만 저승에서 우리 새로 만나 행복하게 삽시다.
-숙희 애비-
일중의 장례식은 3일장으로 동네 사람들과 친정 식구들 도움으로 끝마쳤다. 남편의 주검에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송산댁은 목이 잠겨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며칠을 앓아누웠다. 아버지의 자살을 알 리 없는 숙희는 여전히 불러오는 배를 만지며 킥킥거리며 웃고만 있었다.
기가 막혔다. 저것이 임신을 하다니…. 임신! 안 돼. 절대로 안 돼. 저것이 정신도 없는 저것이 어떻게 애비도 모르는 아이를 낳아 기른단 말인가. 말도 안 돼. 말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송산댁은 딸을 산부인과로 데리고 가 낙태 수술을 시킬 것을 혼자 마음먹었다. 그래, 그 방법이 제일이야.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워 버리는 거야. 송산댁은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장롱 속에 들어 있던 금반지며 시집 올 때 마련해 온 몇 가지 패물을 챙겼다. 이것을 팔면 수술비는 되겠지….
그러나 정신 나간 다 큰 딸을 어떻게 병원까지 데려간단 말인가. 송산댁은 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택시를 잡아타고 산부인과로 가서 의사를 왕진 요청하였으나 진찰을 받은 결과 낙태시킬 수 있는 기간은 이미 지났으며 지금은 도저히 불가능하단다. 그것도 태아가 하나도 아닌 둘이다.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진단 결과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또 한 번의 절망이었다. 하루 종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으며 도무지 뚜렷한 대안이 서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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